2023년 겨울호

60 계간 포도 2023년 겨울호 는데, 근육질 몸의 청년을 보니 나무들이 새 주인을 잘 만났구나 싶었다. 청년 은 내년 농사를 위해 일찍부터 와서 과수원의 지형을 익히고, 가을 소독을 하 고, 이곳저곳을 점검하는 천생 농사꾼이다. 딸자식 믿음직스러운 사위에게 시 집보내듯 섭섭하면서도 기쁘게 농사의 바통을 새 주인에게 넘겨주었다. 그렇게 해서 올해 이전과는 다른 가을을 맞았다. 코로나 이후 잦아진 문화 행사에도 참여하고, 난생처음으로 친구의 밤밭에 가서 알밤 줍기도 했다. 그리 고 오늘은 두 친구와 해 저무는 줄도 모르고 깻잎 따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. “해 넘어가겠다. 그만 따고 가자.” 친구의 말에 고개 들어보니 골짜기에서 놀던 산그늘이 벌써 중턱의 들깨밭 근처까지 올라왔다. 고요하면서도 황홀한 금빛을 발하며 저물녘의 해가 둔덕의 억새에 작별을 고하고, 장엄한 작별 인사를 받은 억새는 이 계절 가장 화사한 금빛 억새꽃으로 화답하고 있다. 트럭을 타고 내려오는 길, 모퉁이를 돌자 해는 이미 넘어갔는데 홍시 빛 노 을이 서쪽 하늘을 물들이고 있다. 하루의 삶을 마감하기 직전에는 억새를 어루 만져 금빛 찬란한 꽃을 피우게 하고, 이미 지고 난 뒤에도 저리 아름다운 빛 을 남길 수 있다니. 돌아보니 군데군데 얼룩진 나의 삶, 이런 나의 삶도 언젠 가는 맞이할 마지막 모습이 저리 아름다울 수 있을까. 하나의 문이 닫히고 새롭게 열린 문 안으로 첫발을 디딘 나. 저무는 모습이 더 아름다운 삶에 대한 화두 하나 마음에 담고 덜컹거리는 산길을 내려온다. ☞ 이 수 안 2004 문예운동 등단 저서 : 《날마다 해가 뜨는 이유》《포도밭에서 쓰는 편지》 주소 : 충북 음성군 음성읍 가섭길 97-6 연락처 : 010-4328-1285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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